[책마을] 귀신도 권세가 집에는 얼씬 안했다

입력 2021-12-23 18:05   수정 2021-12-24 02:10


“이 방에 산 사람 냄새가 나니 함께 잡자.” 부인 귀신의 목에는 비단 띠가 둘러졌고 두 눈은 툭 튀어나와 양쪽 뺨까지 걸려 있었다. 내민 혀는 한 자가 넘었다. 옆에서 머리 없는 귀신이 들어왔는데, 손에는 머리를 쥐고 있었다. 뒤에도 두 귀신이 있었다. 하나는 온몸이 검고 귀, 눈, 입, 코가 온통 모호했다. 다른 귀신의 사지는 노랗게 부었으며 복부는 다섯 섬이 들어가는 물통보다 컸다. ‘조용한 객실’을 찾은 손님이 맞이한 것은 물에 빠지고, 불에 타고, 목을 매 죽은 귀신들이었다.(‘섭노탈(葉老脫)’ 중)

《청나라 귀신요괴전》은 중국 청나라 시대 작가 원매(1716~1798)가 쓴 《자불어(子不語)》 완역본이다. 온갖 귀신과 요괴가 등장하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전개되는 에피소드 572편이 수록됐다. 1800년 간행된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와 더불어 중국 괴기 소설의 쌍벽을 이룬다.

‘자불어’라는 책 이름은 ‘공자께선 괴력난신에 대해 말씀하지 않았다(子不語 怪力亂神)’는 《논어》의 유명한 구절에서 따왔다. 책은 공자가 입에 올리기 꺼렸던 괴상하고 폭력적이며 난잡한 사건과 귀신들의 이야기만 골라서 모았다. 서언에서부터 “괴력난신에 대해 공자는 말한 적이 없지만 용혈(龍血·용의 피)과 귀차(鬼車·상상 속의 괴물 새) 등에 대해선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언급한 바 있다”고 당당하게 밝힌다.

책에는 각종 영화나 드라마에서 자주 접했을 법한 기담이 가득하다. 선량한 ‘혼(魂)’은 사라지고 우둔한 ‘백(魄)’만 남아 좀비처럼 산 사람을 쫓아다니는 산송장 얘기부터 “너는 올해 10월 모일 죽을 것이야. 절대로 이 난관을 벗어날 수 없으니 속히 후사를 준비하라”는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의 한 장면과 같은 죽음 예고까지 시공을 초월해 사람을 홀리는 모습은 비슷하다.

특히 다양한 목록의 괴수와 귀신들은 현대의 게임에 등장시켜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커다란 재두루미 형상을 한 나찰조(羅刹鳥), 오로지 사람의 눈알만 먹기 좋아하는 추악한 귀신 약차(藥叉), 사람을 잡아먹고 금과 은을 대변으로 내놓는 고(蠱)를 비롯해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 개 달린 귀신인 수라(修羅)와 벽려(·아귀)까지 기괴한 존재들은 끊임없이 얼굴을 내민다.

귀신 이야기에는 당대의 중국 사회상이 적나라하게 반영됐다. 귀신들도 빈궁하고 비천한 집안은 뜯어 먹을 것이 없다며 피하고, 권세가의 담은 뒤탈이 날까 두려워 함부로 넘지 못한다. 특히 이해관계에 대한 정산은 철저하게 진행된다. 은 30냥을 뇌물로 옥졸에게 주고 관에 매장해 달라고 부탁했던 죄수는 ‘인혈 만두가 폐병에 좋다’는 미신을 믿은 옥졸이 자신의 피로 만두를 빚자 “내 피를 돌려다오, 내 은을 돌려다오!”라고 죽어서도 외친다. 자손이 잘되길 바란 귀신은 과거 시험 채점관의 꿈에 나타나 “‘계화향(桂花香)’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답안지를 잘 봐달라”고 청탁한다. 때로는 귀신조차 남의 명의를 사칭해 사기를 칠 정도로 이재에 밝다.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눈 깜짝할 새 뒤바뀐다. 경현 출신 섭씨는 대풍을 만나 침몰한 배에서 유일하게 살아나지만 평소 집에서 불 관리를 등한시하다가 불에 타 죽는다. 오만방자함이 하늘을 찌르던 주삭은 자신의 가족을 귀신으로 착각해 자신의 손으로 몰살한다.

책에 등장하는 귀신들은 두려우면서도 두렵지 않은 존재다. 때로는 요염한 미녀의 모습으로 사람을 홀리고, 때로는 기괴하고 추한 형상으로 사람을 벌벌 떨게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과 귀신의 경계가 자주 흐릿해진다는 점이다. 책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별천지를 그린 게 아니라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탓이다. “사람은 아직 죽지 않은 귀신이고, 귀신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문구가 오히려 귀신보다 무섭게 다가온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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